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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 반전 콤플렉스와 더듬기로 나아가기: 《Something Traceable: 더듬어 볼 수 있을 법한 것들》을 위한 서문

 

황재민

 

1.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기에 그런 슬픈 기분이 드는 것이 세상에 많지만, 어쩌면 그중 하나로 건축과 시각 예술을 예로 들 수 있을지 모른다. 둘에게는 다양한 역사를 쌓았던 실제 접점이 존재했다. 이를테면 건축 평면의 구성 요소로써 회화가 포함되거나, 혹은 총체 예술의 구현을 위해 두 가지 다른 역사가 총합되거나. 하지만 모더니즘의 전반적인 붕괴 이후 ‘평면’이, 그리고 총체 예술이라는 상상의 소실점이 함께 무너지면서 이 만남은 이제 쉽게 타진할 수 없는 가치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그 이후라고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니라서, 지리적 거리가 상상적으로 유실된 세계화의 망상 속에서 건축의 크기는 지나치게 거대해졌고 예술은 이 확장을 용인하는 장치가 되고 말았다. 둘의 협업 과정에서는 미해결된 비판의 문제가 환기될 뿐이며, 결과적으로 예술과 건축의 상호 교차는 기만적 결과물을 도출할 따름이다. 여전히 슬픈 기분은 해소되지 못하였으며 그러므로 누군가는 이것을 일종의 콤플렉스(complex)라고 가리키게 되는 것이다.

 

정신적 신경증의 의미를 갖는 동시에 군산 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의 삼엄한 의미를 함께 포함하기를 바라며, 미술평론가이자 미술사가인 할 포스터(Hal Foster)는 예술과 건축의 협업을 ’예술-건축 콤플렉스(art-architecture complex)‘라 정의한다. 이 단어를 통해 그는 시각 예술과 건축이 상호 교차하는 지점을 여럿 가려내고 동그라미 치는데, 여기서는 개 중 회화와 관련된 특정한 의견을 특기해본다. 무엇보다도, 그는 도널드 저드(Donald Judd)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즉자성과 환원성을 경유해 환영성과 자의성을 제거하고 회화도, 조각도 아닌, ‘특정한 물체(specific object)’를 기립시키고자 애썼던 역사적 주장을 다시 살피며, 그는 ‘특정한 물체’가 실은 자신의 내부에 채 갱신하지 못한 회화성과 환영성을 여태 지닌 일종의 지연이라고 다시 쓴다. 미니멀리즘에 있어 ‘회화적인 것’을 주제로 삼았던 모종의 흐름엔 이처럼 극복하지 못한 부분이 남아 있었고, 저드의 작업이 환영의 승리를 비밀스럽게 승인한다면, 댄 플래빈(Dan Flavin)의 작업은 빛이 공간을 잡아먹으며 환영을 분출하는 ‘장소 침식적(site-erosive)’인 상황을 펼쳐낸다. 이 두 역사적 사례에 숨겨진 증상을 발판으로, 이를테면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과 같은 (비교적) 새로운 작가들은 거대한 미술관에 걸맞은 침식적 환영을 성공적으로 펼쳐낼 수 있었다. ‘예술-건축 콤플렉스’의 일종으로서, 회화(적인 것)는 이미지의 스펙터클을 영리하게 반입하는 비밀 요원의 역할을 수행한다. 회화의 영역에서 채 파쇄되지 못한 환영이 건축의 부적절한 크기(미국적 도덕을 가장한 남근적 증상인)에 어울리는 이미지를 구성하고, 장소마저 집어삼키는 착취적 스펙터클은 미니멀리즘이 구축한 비판, 스펙터클의 소거를 위하여 동원된 비판을 무효화한다. 이렇게 ‘예술-건축 콤플렉스’란, 재고할 필요가 있는 흐름이 된다.

 

하지만, 문제를 단순화해보자. 여기서 문제는 어쩌면 크기의 것일지 모른다. 자본에 맞춰 확장한 구조가 이미지로 증발하고 증발한 이미지가 구조의 필연성을 장식적으로 주장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크기의 문제가 반전된다면 어떨까? 미술이 건축처럼 확장되는 대신, 건축이 미술의 크기를 따라 고이 접혀 버린다면? 그중에서도 크기가 비교적 제한되어 있는 모종의 매체, 건축의 영역처럼 커지기는 아무래도 어려워 보이는 무엇, 이를테면 회화의 영역으로 접히게 되어버린다면? 그때도 여전히 회화(성)은 환영적이며, 그렇기에 기만적인 무언가가 될까?

 

2.

 

개인전 《Something Traceable: 더듬어 볼 수 있을 법한 것들》(2021)을 여는 이유경은 회화를 지속하며 공간에, 그리고 장소에 대해 관심 가져왔다. 친근한 장소성이 깃든 동네 담벼락 같은 것을 물질 차원에서 포착하거나 개인적 서사가 담긴 특정 장소를 지도나 도면 같은 비서사적 이미지로 탐구하거나, 작가는 과거 진행한 미공개 작업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회화와 장소를 연결 짓곤 했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 포함된 2019년의 작업 〈더듬어 감각하기(Tracing Beyond Senses)〉 시리즈는 이와 같은 관심이 보다 직접적으로 표출된 예로 보인다.

 

이유경은 〈더듬어 감각하기〉 시리즈에 대해, 근대의 주거 공간을 둘러싼 근대적 욕망을 담은 이미지들이 회화에 병치되는 효과를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사라진 근대의 시공간을 회화의 영역에서 구현하며 공간의 동시대적 의미를 찾아보겠다는 그의 말속에서, 잠깐 병치라는 방법에 대해 주목해보기로 한다. 이 이미지들은 어째서 하필 회화와 병치되어야 했을까? 어쩌면 그것은 회화를 향한 작가의 관심사와도 관련이 있다. 작가는 회화 내부의 시공간을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 흔히 ‘평면’이라 호명되는 회화지만, 고전적 투시 공간이 아주 오래전에 불가능해졌음에도, 아니 오히려 불가능해졌기에, 회화를 다루며 공간을 찾는 일은 여기서 언제나 중요했다. 회화 작업을 계속하며, 작가는 회화의 내부 공간에 대한 관심과 의문을 갖게 되었고, 이 문제를 장소성이라는 오랜 관심사와 접붙이게 되었으며, 그렇게 이미지를 회화와 병치하게 되었기에, 첫 번째 “더듬기”가 시작될 수 있었다.

 

한데 이 “더듬기”의 행방은 건축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건축이야말로 근대의 욕망을 가장 직설적으로 함축하는 이미지인 동시에, 공간과 장소의 문제와도 밀접하게 연계되는 역사이기에 그렇다. 이유경은 〈더듬어 감각하기〉 시리즈에서 회화를 위해 건축을 기호로 전유, 기입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여기선 1950년대 지어진 국민 주택을 찍은 사진이나 유엔한국재건단장(UNKRA) 초대 단장 존 B. 콜터(John B. Coulter)의 동상과 그것을 조각하는 조각가의 기록 사진, 안암동 문화주택지구를 촬영한 항공 사진과 ‘운크라 주택’의 도면, 그리고 탐욕스러운 다주택자를 묘사한 만평까지 여러 이미지가 포함된다. 이처럼 건축을, 건축을 통해 환기될 수 있는 모종의 장소성과 사회사 등을 인용하기 위하여 작가는 가용한 평면 이미지를 찾고 골라내는데, 이렇게 건축은 효과적으로 축소된다.

 

여기서 회화는 건축에게 필요한 크기를 침해해 제거하고, 이 과정에서 의외의 비평적 효과가 발생하는 듯하다. 작가는 장소성에 대한 관심을 근대적 이미지와 욕망에 대한 관심으로 전이시켜 다루고, 이를 위해 지역적인 것에 대해 꾸준하게 생각해왔다. 그리고 이건 건축, 나아가 근대, 나아가 모더니즘이라는 큰 영역을 형식적으로 소환, 빈틈투성이 껍데기로 다루는 대신, 근대의 지역성 혹은 지역의 근대성을 놓지 않으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어쩌면, 회화에 맞는 크기로 건축을 접고 포개는 동안 건축적인 것은 지역을 입고 구체화된다.

 

그러나 여기서 건축이 마냥 이미지로 축소된다면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고 말 것이다. 이 상황을 피하고자 한다면 가상의 합의점과 무능한 중간을 찾기보다는 어떤 긴장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과거 〈더듬어 감각하기〉 시리즈가 처음 전시되었을 때, 그것과 함께 놓인 확장된 상황이 있었다. 〈제스처들의 모음(A Collection of Gestures: The Props)〉(2019)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실험은 ‘제스처’ 정도의 무게를 갖는 작은 작업의 군집이었는데, 이것은 작업이 회화로 수렴되는 상황을 저지하고 대신 회화가 평면을 초과한 뒤 다른 오브제들과 같이 놓여 넓게 퍼지게끔 조작하는 ‘제스처’로 보이기도 했다. 또한 이것은 크기를 매개 삼아 회화의 시점과 건축의 시점을 교환하는 실험으로, 두께를 갖는 캔버스를 덩그러니 놓고 건축의 프로토타입 구성에 쓰이는 미니어처 인간 모형을 함께 놓아 회화를 하나의 건축물처럼 보게 될, 작은 인간의 시점을 상상했는데, 여기서 건축은 회화와 상상적으로 엮여 서로 분절할 수 없는 관계를 형성했다. 그러므로 작업은 다시 한번, 그러나 미니어처의 크기로, 예의 ‘콤플렉스’를 만들어낸 셈이다. 다만 이렇게 축소된 ‘콤플렉스’에서는 군산복합체가 형성하는 무시무시한 복잡계가 아니라 신경증에 가까운 무엇이 표출되는 듯하다. 건축을 표피화하는 것에 대하여, 회화를 기호화하는 것에 대하여, 그럼에도 회화와 건축을 접붙이는 필연성에 대하여 나타나는 긴장이 하나의 증상처럼 작업에 입혀진다.

 

한 편, 신작 〈페인팅 샘플(Painting Samples)〉 시리즈(2021)는 타일을 따라 그린 회화를 타일 카탈로그를 모방한 지지체 위에 배치해, 상품의 상태를 전유한 결과다. 타일은 그 자체로 반짝거리는 완결된 상품이 아니라 건축의 영역에서 표면을 담당하는 부분이자 ‘수열적(serial)’ 생산의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막상 〈페인팅 샘플〉의 생김새는 수열적 생산물의 그것과는 다르게, ‘모던’한 구석이 하나 없이 (심지어) 화려하다. 이 기이한 배치 역시 오늘의 지역을 살피고 작업에 부여한 결과인데, 작가는 작업을 위한 리서치 과정에서 벽이나 바닥 타일을 향한 동시대의 욕망을 파악한다. 표정 없는 ‘모던’한 외양을 지우고 마치 ‘회화 같은’ 매력으로 멋을 부린 타일의 마케팅을 포착한 작가는, ‘인테리어’에 서리고 표출되는 한국인의 욕망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고, 대체 어떤 욕망이 이 ‘끔찍한 혼종’을 가능케 만들었던 것인지… 직접 들어가 분석해보아야 했던 것 같다. 동시대 회화가 상품으로의 물화로부터 벗어나고자 애를 쓰는 동안 미니멀리즘의 이상이었던 산업 생산물은 정작 (가장 저열한 의미에서의) 회화를 향하고자 한다는 이 모순적 상황의 가운데에서, 건축(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을 지역의 장소성을 매개하며 맞부딪히는 작가의 방법론은 다시 한번 유용하다.

 

허나 회화 작가의 시점에서 타일-회화와 같은 괴물체를 긍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치 미니멀리즘 예술가들이 ‘작업자’의 상태를 자처한 것과 같이, 작가 역시 〈페인팅 샘플〉을 위해 회화 작가의 그것에 앞선 디자이너의 시점을 선택한다. 그 결과 작업에는 또 한 가지 수상한 사건이 벌어지는데, 모든 관객이 이 타일-회화를 실제 상품 카탈로그를 보듯 내키는 대로 직접 만져 질감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페인팅 샘플〉은 장식으로 평가절하된, 그러나 동시에 상품으로 추구되는, 기묘한 좌표의 회화를 전유하며 비판적 효과를 내려 하지만, 회화의 중력은 언제나 강력하기에 그것이 일단 어떤 모습으로든 전시장 벽에 걸려 있다면 비판의 효과는 감소할 수 있다. 그러나 진짜로 만질 수 있는 물질이라면 그것이 회화라고는 믿어지지 않고, 그렇기에 이 장치는 회화의 중력을 잠시 흐트러뜨리기에 적절하다.

 

더불어 장치로 놓인 촉감은, 건축과 회화에 대해 고민하면서, 작가가 염두에 둔 또 하나의 맥락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그 고민은 최근의 디지털적 전환과도 관련이 있다. 점차 일상화된 인터넷이 인간 삶의 여러 부분을 잠식하며, 그 탓에 이를테면 촉각과 같은 지각은 그만 망실되어버리고 말았는데, 이 사실은 회화에게 의외의 전환을 가져다 주었다. 회화는 이런 지각의 상실을 만회하고 사라진 촉각성을 환기할 수 있는 매체로 주목 받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회화의 영역에서 ‘디지털적인 것’은 종종 시학의 맥락에서 다뤄졌는데, 하지만 건축의 영역에서, 이 전환은 예기치 못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러운 무엇이었으며, 디지털 환경은 도구로서 자연스러운 건축 생산의 일부였다. 하나의 전환에 대한 두 가지 다른 맥락을 교차시킨 뒤, 〈페인팅 샘플〉은 회화가 지니고 있다고 가정된 물성을 직접 감각할 수 있게 내버려 두며 관객에게 묻는 것 같다. 그래서 여기에 있는 물성이 무엇일까요? 그러나 어쩌면 이 답은 만질 수 있는 작은 타일-회화들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박제된 3D 모델링 이미지, 〈미리보기(Preview)〉(2021)로부터 찾아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3.

 

누군가의 첫 번째 개인전에 대해 생각하며 여러 질문을 떠올리지 않기란 어려울 것 같다. 이것은 《Something Traceable: 더듬어 볼 수 있을 법한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언뜻 삼엄한 듯 보이는 근대의 이미지들이 어째서 이토록 생생한 색으로 다뤄졌는지, 회화의 크기로 재구축된 건축이 그 역의 경우로 확장될 여지가 있을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인지, 지역화한 모더니즘을 외면하지 않는 방법을 찾고 만날 수 없는 두 영역을 교차시키기 위한 불가능한 방법을 고민한다면 결국 어떤 네트워크가 파생되고 말 것인지,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모종의 네트워크가 ‘콤플렉스’라는 예술-건축의 복합체를 대체하거나 최소한 분산할 수 있을지, 그리고 또 지금은 미처 떠올리지 못한 또 다른 이야기들에 대해, 여기서는 다만 다양한 물음표를 남겨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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