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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ID-19 Essay Project for Anna

8월 14일, 서울 한국의 사랑제일교회에서 코로나 확진자 13명이 등장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숫자는 3일만에 134명으로 눈덩이처럼 불었고, 하루 확진자 수를 30명 안팎으로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던 한국의 일상에 다시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2월 18일, 신천지 발 슈퍼전파자가 나타나며 일일 확진자 숫자가 100을 넘나 들었던 올해 초의 악몽과 겹쳐 보인다. 그러나 사실, 많은 전문가들은 그 이상의 심각성을 지니고 있다는 진단을 내리기도 한다. 올해 초 한국의 대규모 집단감염은 대구를 중심으로 발생하였다면, 이번에는 인구 밀집도가 훨씬 높은 서울에서 생하였다. 그와 더불어 8월 15일은 한국의 광복절로 – 일본에서는 패전일인 – 때마침 14일부터 17일까지 3박 4일간 여름 휴가를 떠난 한국인들이 적잖다. 우리 가족을 포함해서 말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한국 서울의 사랑제일교회는 국내 개신교 소속 교회 중에서도 상당히 이단아에 가깝지만, 어찌되었든 이전에도 교회에서 소규모 집단감염은 계속 발생해 왔다. 물론 전세계적인 감염 추이를 보았을 때에도, 종교시설은 감염병에 취약한 공간이다.[1] 이러한 위험성이 표면위로 공공연히 드러나며 현 시점에서는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이지만, 올해 초 우한에서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을 때, 한국의 대형 교회 목사들은 중국 국민들이 코로나로 고통받는 이유는 하나님을 배격하고 선교사들을 핍박한 것에 대한 심판이라고 설교한 바 있다.

나는 기독교를 믿는 한국인이다. 모두가 꺼리던 나병 환자를 먼저 나서서 찾아가던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지 못하고,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눈물을 흘리기 보다 “하나님의 심판이다, 꼴 좋다”라며 중국에게 손가락질하는 교회의 습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2] 그 논리대로라면 사랑제일교회도 하나님의 심판이리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성경 구절은 퇴색하였는가.

중요한 것은 시스템의 문제이다. 특히 종교시설에서 집단 감염이 계속 발생한다면,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종교시설이 내포하고 있는 공간배치 구조, 그 공동체 사회가 굴러가는 방식. 같은 사고의 방향성을 따라, 중국에서 신종 전염병이 자주 발생한다면, 그 나라의 방역체계는 어떠했는지, 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관한 외부 정보를 공개하려던 우한의 ‘리원량’ 이라는 의사가 우한 경찰에 의해 허위사실 유포죄라는 명목으로 경고와 훈계를 받아야만 했는지를 따져야 한다.

전세계적인 상황과 비교했을 때, 나에게 있어서 애증의 존재인 그 아시아적 집단주의 문화 덕택에 팬더믹 와중에도 나의 삶을 타 국가에 비해 안전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연장선상으로, 재난은 모두를 공평하게 덮치지 않는다.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방역에 성공하였다고 한때 찬사를 받았던 한국 내에서 조차도 그러하고, 마스크를 쓰는 것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덜 불편히 여기는 동아시아권에서도 각 나라별로 조금씩 코로나 전염과 방역의 양상이 조금씩 다르다. 전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에도 그러하다. 제 1세계 국가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응할 수 있는 전략의 가짓수와 제 3세계 국가가 가진 선택지는 너무나도 부실한 것들이다. 오스카 작품상을 수상한 기생충의 한 장면에서 보여지듯, 누군가에게 갑작스러운 비는 캠핑을 취소하고 돌아와야 하는 사소한 불운이지만 다른 이에게는 삶의 보금자리를 앗아가는 수해로 자리매김한다.

한국은 우습게 운이 좋았다.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3연속을 겪으면서 살아남기 위해 안정적인 방역체계를 이룰 수 있었고, 더불어 북한과의 전쟁이 발발하면 생화학 무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했다. 또한 중국으로부터 날아오는 미세먼지 때문에 마스크를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대량생산 할 수 있었으며, 한국인들에게 높은 의료접근성을 선사해준 국민건강보험 제도는 80년대에 한국을 통치하던 독재자가 민심을 달래기 위한 방편으로 제정된 도구이기도 했다. 이럴 때에는 적자생존의 법칙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남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와 같은 장점이자 특징을 가진 한국에서, 또 한가지 주목해야할 성격이 있다. 한국인들 중 종교를 믿는 사람은 약 46%이며, 종교인들 중 27%가 – 천주교와 개신교를 합하여 - 기독교인이다.[3] 20세기 초 제국주의의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는 지구 상에서 아주 하찮은 나라였던 한국은, 아이러니하게도 서양 열강의 기독교인 선교사들의 인도주의적인 헌신 아래 많은 혜택을 입었다.[4] 그 이후로, 교회라는 모임 장소는 한국인의 공동체 사회에서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빠른 근대화와 고도성장기를 거치며 교회의 몇몇 구성원들은 한국의 기득권 세력의 그 자체가 되었고, 20세기 초 식민주의 시스템과 7~80년 독재정권에 대항하던 진보적인 성격을 잃어가게 되었다. 이는 분명 중국 혹은 일본에서는 관찰되지 않는 한국의 슬프고도 독특한 모습이다.

재난은 장소를 막론하고 고상한 시스템과 문화를 발가벗겨버린다. 한국 사회의 추한 민낯을 드러낸다. 정체성을 숨기고 상대방을 속이는 수법으로 신도수를 늘리는 사이비종교가 태동한 데에는 어딘가 병든 한국 교회 사회가 큰 기여를 했다. 마음이 병든 공동체는 육체에 깃드는 병을 더더욱 증폭시켰고, 백신이 없는 그 감염병은 공동체의 묵은 고름을 터뜨리고 가시화했다. 다양성을 존중하자 외치던 서양 민주주의 국가에서 바이러스로 인해 인종차별주의가 더욱 극대화되었고, 불가피하게 환기가 어려운 밀집된 장소에서 일해야 하는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무더기로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야 했고, 인간이 지구 온난화를 거쳐 지상의 종말을 향해 전력질주 하고 있었음을 더더욱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을, 그 다음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한국은 K-방역이라는 이름의 자아도취를 넘어 국내의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처우와, 일본 크루즈선 코로나 집단 감염 사건을 비웃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아파하는, 과거 식민지 국가로서의 상처를 넘어 다른 나라의 상처도 함께 보듬어줄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될 수 있을까, 그 상대가 설령 지배자 국가였을지라도.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이것 저것 꼬여버린 동북아시아 공동체는 소위 선진국 간의 파이싸움에만 열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바깥을 사유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의 인류는 미래 세대를 위한 환경을 위해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다소 포기하고 양보할 수 있을까. 인류는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성경에 그리 쓰여 있지만, 나는 그럼에도 다시 기도한다. 부디 이 모든 바람이 의미 있기를.

 

위와 같은 글을 쓸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 해준 안나에게 고맙습니다.

2020.08.17.10.48pm 마침.

*위 글은 안나 사사키의 'Vacancy'진 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코로나 팬더믹 속에서 살아가는 다른 나라 주민들의 이야기를 접하실 수 있습니다.  Vacany 진 링크: https://issuu.com/zenmetsutaro/docs/vacancy20210516_

[1] ‘How a 16000-Strong Religious Gathering Led Malaysia to Lockdown’, Bloomberg https://www.bloomberg.com/news/articles/2020-03-17/how-a-16-000-strong-religious-gathering-led-malaysia-to-lockdown

[2] 구약에서 선지자를 보내 ‘그 나라가 멸망한 이유는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라는 것을 밝힌 경우도 있지만, 직접 계시가 존재했던 3000년 전의 세계를, 신약은 건너뛰고 어떻게 2020년도의 시공에 같이 두고 이야기할 수 있나.

[3] 물론 젊은 세대로 내려갈수록 교회를 다니는 사람의 숫자는 점점 줄고 있다.

[4] 이는 프랑스 발 가톨릭 선교사들과 아프리카 주민들이 맺었던 관계와는 좀 달랐다. 분명히 프랑스는 기독교 선교사들을 식민 정책의 일환으로서 원주민들을 꼬드기기 위해 먼저 내보냈다. 한국 내에서 주류로 자리잡은 기독교는 북부 미국의 개신교를 뿌리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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